2024,0717 다행과 불행 사이

다행과 불행 사이
“웃을 상황도 아닌데 잘 웃는 걸 보니 좋네.”
‘뭐가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 뭐가 좋다는 거야? 기분 정말 더럽네.‘
내 앞에 앉아 ‘장애 비하’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저 사람은 바로 나의 ‘고모부’다.
나는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고모부가 입을 열면, 내 입을 닫는 식으로, 고모부가 말을 시작 하면 유독 반응하지 않았다. 스스로 잘못을 깨달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 간주되었으므로, 눈치라도 있다면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길 바랐다.
농담이었다면, 농담일 수 없는 말을 농담으로 한 것이 문제였고,
진담이었다면, 진짜이거나 진실일 수 없는 말을 진담으로 한 것이 문제였다.
뭐가 웃을 상황이 아닌지 설명해 보라며 한 마디 쏘아 부치고 싶었지만, 혹시 그렇게 오고 가는 말들이 친근함이라 착각할 만큼 눈치도 없을까 싶어, 나는 더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다행인 건 고모부는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불행인 건 고모부가 고모와 아직 함께 살고있다는 것이고,
더 불행인 건 고모는 고모부와 앞으로도 같이 살 것이라는 것,
다시 다행인 건 내가 고모부와 살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고모부는 예전부터 나와 내 동생을 탐탁지 않아 했다. 정규 교육 시스템에서 벗어났고, 문신과 피어싱이 있고, 홍대 바닥을 돌아다니며 시시껄렁한 애들과 어울리는 반항아, 할머니 손에 맡겨진 좀 가여운 아이들. 이것이 고모부가 지정한 우리 남매의 모습이었다.
‘설마?’,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25년에서 30년 전 우리 남매를 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대부분 그러했기 때문에 썩 놀랍거나, 새롭지는 않았다.
고모부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 우리 남매와 어울리는 걸 달갑지 않아했다.
그건 꽤 노골적으로 드러났기에, 나는 나같은 족속과는 다른 고모부의 하나뿐인 귀한 아들과 친하게 지냈다.
사촌 동생이 스물한, 두살쯤 되었을 때, 서울에서 지낼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사촌 동생에게 연락했다.
실제로는 시시하지도, 껄렁하지도 않지만, 고모부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시시껄렁해 보일 수 있는 내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사촌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 그를 데리고 홍대와 이태원을 누비며 놀았다.
사촌 동생은 생각보다 내 친구들과 잘 놀았다. 평소 고모와 고모부에게 가지고 있던 답답함과 갈증을 토로하기 시작하며, 그는 나와 더 자주 어울렸다. 우리는 ’낄낄 거리고 웃으며 어른들과 세상 욕을 하다, 어느새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친구가 되었다.
두 달쯤 그렇게 지냈을때, 사촌 동생은 갑자기 외국으로 가게 되었다. 유학인지, 유배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후로 이따금씩 고모부를 만날일이 있었는데, 나는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는 사촌 동생의 안부를 일부러 묻곤했다. 고모부는 내가 자신의 아들에 대해 묻는 것 만으로도 은근한 신경증이 돋는 사람이었다. 넓게 드러난 이마가 꿈찔거리는걸 보면 확실했다. 대답을 얼버부리거나 회피하면 더 캐물었다. 얄미운 고모부가 자극 받는 모습을 보는게 솔직히 재미있었다. 더 집요해지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웃음을 참았다.
고모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싱글이었던 고모는 첫 조카인 내가 얼마나 예뻤는지, 월급만 타면 백화점에 들러 내 옷을 사들고 찾아왔다고 했다. 사는 지역도 달라지고, 크면서 겨우 명절에나 보는 고모와 데면데면해진 건 당연했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어릴적 나는 고모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고, 고모가 고모부를 데리고 할머니 댁에 왔을때, 사촌 동생이 태어나 아기였을때 등 고모를 통해 공유 받은 몇몇 기억이 나와 고모를 얇게나마 이어주고 있었다.
고모는 보수적 성향의 고모부를 만나 깔끔하고, 단정하고, 안정을 우선시하며 40년을 살았다. 이제는 그 자체로 자신이 되어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젊은날의 상냥하고, 웃음기 많던 고모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희미하게 지워졌다.
고모가 더 이상 내 추억 속의 그 사람이 아니듯, 나와 내 동생도 어릴 적 고모가 예뻐하던 귀여운 아이들이 더 이상 아니었다.
우리의 모습은 고모가 만들어온 삶의 방향성 반대편에 위치한 것처럼 비쳤고, 급기야 고모부가 무심하게 하던 지적을 고모도 하고 말았다.
가끔 조언 섞인 잔소리는 들었지만, 인신공격이라 느껴질만한 지적을 고모의 입으로 처음 들었을땐 적지않게 충격이었다.
나는 이 모든 걸 고모부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할머니 댁 근처에 살아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꼭 한 번씩은 보던 고모에게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이제는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내가 태어난 부산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고모밖에 없다.
1년전 할머니 기일에 맞춰 고모와 고모부와 함께 산소에 다녀왔다.. 성묘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다 같이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 번 사는거 너희들처럼 사는것도 괜찮을 것 같아.” 고모부의 말이었다. 또 무슨 막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기만 했을 뿐, , 의아하지도 않았다. 신뢰를 잃어버린 사람의 말이란, 창밖에 지나가는 구름보다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될 만큼 나는 오랫동안 은근한 고모부의 차별 발언을 들어왔고, 차별이 차별이라는 것, 편견이 차별이 된다는 것,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행이다.
고모부는 질문을 하고, 나는 대답을 하고, 고모부는 “그건 아니지.” 하던 지리한 시간들. 내 대답을 기다린 건 “그건 아니”라는 부정을 위한 알량한 인내심 같았고, 사실 대답은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부정하기 위해 질문을 찾는 사람 같았다.
나는 일찍이 많은 어른들에게 실망해왔고, 내가 어른이 되자 그들은 여전히 실망스러운 노인이 되어 있었다.
불행이다.
얼마 전 들은 소식에 의하면 사촌 동생은 외국에서 교제 중이던 사람과, 고모와 고모부 모르게 아이를 낳았고, 할머니 장례식이 끝난 다음 해, 아이를 데리고 잠시 한국에 다녀갔다고 한다.
스무 살 넘어서도 속옷까지 사다 입히며 애지중지 키운 아들내미에게 뒤통수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인생무상, 뭐 그런 기븐?
이 소식을 듣고 나니 고모부가 했던 말이 약간 진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모와 고모부에게는 퍽이나 충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사촌 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축하한다.
종종 나와는 너무 달라서 맞지 않는 사람을 이해해 보고 싶어진다.
그것은 마치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계를 돌파해 나갈 수 있는 한 조각 의 퍼즐 같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