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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TORY GIRL

2024,1121 LP



아빠의 물건을 정리하다 오래 간직된 LP 몇 장을 발견했다.
나는 아빠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참 기가막힐 똑같은 음악 취향에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1년 전 끄적였던 메모가 생각났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 보다는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 받기를
- < 김선우> 목포항 중

+
나는 그것에 잠식되어 재가 되도록 타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것은 나를 다르게도, 새롭게도 만들었다. 때론 그런 것들이 나를 특별해 보이게 했다.

깊은 밤 어둠 속 그것은 나와 함께 걸었다.
캄캄한 동굴속에 웅크린 채 누운 내 옆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내 앞에 눕기도 하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 주기도 하고, 싸늘히 식어가는 등짝을 덮어주기도 했다.
그것은 세계와 단절을 환영처럼 보며 꿈꾸지 않던 나를 이생에 더 남게 핶다.

그것은 나를 천도 복숭아처럼 뜨겁게 하고, 한여름 만년설 처럼 차갑게 했다.

많은 순간 그것은 나를 해방 시켰고, 지금도 나를 숨쉬게 한다.

환호하고, 열광하고, 열렬 했던 것.
나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
내 아버지는 딴따라였다.
어릴 적 보았던 커다란 오선지에 빼곡히 그려진 음표들은 그의 재능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의 반지하 작업실은 나의 유년시절 아지트였다. 아버지의 악보에 낙서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아버지의  악기들을 장난감 삼아 가지고 놀았다.

젊은 시절 엄마는 클럽에서 연주하는 아빠를 보고  반했다고 한다.
나는 알고 있다.
엄마는 아빠의 연주를 들은 날, 자신을 감싸는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카오스 에 시달렸을 것이다.
온 생을 다 바쳐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그 클럽 안에 음악을 듣고 있는
자신과 기타를 치고 있는 한 남자,
단 둘만 있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건 착각이나 망상이 아니다. 음악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 밤, 그녀는 쉬이 잠들지 못 했을 것이다.

그 당시 아빠에게 마음을 빼앗긴 여자가 엄마 한 명은 아니었지만,
둘의 세포는  수정에  성공하였다.
나는 닐바나와 딮 퍼플을 들으며 뱃속에서 발길질을 해댔다.
킹 크림슨을 들으며 유유히 양수안을 떠다녔다.

엄마, 아빠의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음악은 내 몸에 유산으로 남았다.

+ + +
음악의 온도에 데인 사람들을 만났다. 우리는 젊었고, 온 몸으로 새겨진 음악 자국은  아름다웠다.
서로가 서로에게 매혹될 수 밖에 없었다.
같이 음악을 듣고 싶어 자꾸 모였다.
음악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만들고, 음악을 찾고, 음악을 나누었으며, 음악을  보았다.
시도때도 없이 모이다 보니 같이 술도 마시고, 춤도추고, 여행도 하게 되었다.
20 년이 훌쩍 지나도록
성별, 나이, 성격, 종교, 피부색, 직업, 사는 곳이 모두 다른 우리는 삶을 나누는 친구로 남아 함께 늙어 가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미친놈들 .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미쳤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자.’
정말 근사한 문장이다.

우리는 그렇게 뜨겁다 못해 음악의 미쳐 있었다.

+ + + +
‘그 길 끝에 네가 있어.

한창 비가 내리던 여름 밤, 노란 우산을 쓰고 홍대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 사이, 빗소리에 섞인 첼로 선율이 나를 불렀다. 내비게이션은 필요 없다. 그저 들리는 대로 가기만 하면 되니까.
나를 잡아 끄는 소리 의 영훈들.

누군가 스피커 아래에 앉아 세운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깨는 조용히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를 내려보다 옆에 앉았다. 그냥 음악을 들었다.
소리의 영혼들은 고요한 심연으로 우리를 초대 했다.
그곳에서 불완전하고 불안한 우리의 젊음을 뜨겁게 연민 했다.

+ + + + +
아버지를 져버릴 수는 있지만, 음악을 버리는 건 불가능한 명제가 되어버렸다.
나를 낳은 것도, 나를 살린 것도, 네 마지막을 함께 할 것도 ,
오직 음악 뿐.

2023년 10월 10일


낡아빠진 아빠의 음악 자산을 입양 보내고 싶다.
관심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어디 책장 한 켠 이라도 LP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수 있다면,
나를 만나러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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